이용우 칼럼
“모국만 바라보지 마라”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한국의 고학력 젊은이들이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가 되기 위해 10대1이 넘는 경쟁을 치렀다. 한국 광부의 독일 파견은 1963년부터 1977년까지 14년 동안 이뤄졌으며 총 7,936명이 독일 광산에서 일했다. 간호사 1만1천여 명을 합친 2만여 명이 고국에 송금한 돈은 한국 경제발전의 종잣돈이 됐다.
광부.간호사 파독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마침 한-독 수교 130주년이기도 하다. 모국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토론토 등 해외에 사는 230여 명의 광부출신 동포들은 이 같은 소식에 가슴 설레며 모국을 찾았다. 그러나 모국에서는 이들을 기다려주는 사람도, 묵을 곳도 없었다. 졸지에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모국의 언론들은 이들에 대해 ‘노숙자’라느니 ‘앵벌이 관광’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정체 불명의 주최 측을 비난했다. 하지만 정작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은 본인들이었다. 자존심은 무참히 짓밟혔고 고국에 대한 환상도 산산조각 났다. 젊은 시절 이역만리에서 피땀 흘려 일하며 모국 경제성장에 기여했던 이들에게 돌아온 보답이 이런 것이었다. 뒤늦게 정부가 나서 숙식과 관광일정을 주선해주긴 했지만 다분히 ‘억지춘향’ 격이다.
이런 해프닝을 보면서 같은 해외동포로서 입맛이 쓰다. 모국에서는 동포들을 얼마나 측은하게 여길까. 모국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해외에서 온 동포들은 행색도 초라하고 나이도 늙어 추레한 모습들을 하고 있으니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을지…
파독광부.간호사 출신들의 모국방문 행사는 사실상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가장 많은 180여 명이 방한한 토론토에서는 이름도 그럴 듯한 유령단체 관계자가 파독광원·간호사들을 모아놓고 설명회를 열고 돈까지 걷었다. 설명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정에 청와대 방문까지 들어 있어 철석같이 믿었다.
이 같은 일이 왜 일어날까. 바로 ‘모국 방문’이라는 달콤한 유혹 때문이다. 해외에 사는 동포들은 모국을 찾는 것이 큰 기쁨이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가는 것보다는 어느 단체의 일원으로 가야 모국 정부로부터 대접도 받고 두루 산업관광도 즐길 수 있다. 특히 수년 전부터 한국정부가 해외동포 배려 정책을 쓰면서 모국초청 사업이 부쩍 많아졌다. 민주평통 해외지역회의 , 세계한인회장대회, 세계무역인협회, 해외한글학교 교사연수회, 이북도민회, 차세대 지도자, 과학기술자대회, 재향군인회, 각 군 관련 단체, 해외언론인대회 등, 모국초청 사업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다.
모국 초청 행사는 대개 숙식과 항공료를 주최 측에서 전액 또는 일정부분 부담해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가는 것보다 유리하다. 이러다 보니 동포사회에서는 모국 행사에 서로 참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경쟁이 벌어지고, 초청자 선정을 둘러싸고 잡음도 일어난다.
특히 모국을 방문할 때는 해외에서 어떤 단체에라도 속해 활동한다는 인상을 줘야 성공했다는 표시로 비치기 때문에 온갖 교민단체에 끼려고 애를 쓴다. 이러다 보니 정작 현지에서는 이름도 없는 단체에 들어 있으면서 모국에 가서 명함을 내밀면 대접을 받는다. 내심 이 재미로 교민단체에 들고 단체장을 맡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해외 현지에서의 욕구불만을 모국에 가서 해소하려는 측면도 크다.
특히 단체이름이 거창할수록 후한 대접을 받기에 온갖 ‘상위 단체’가 생겨난다. 대표적인 예가 캐나다한인회총연합회(총연)이란 곳이다. 캐나다 전역의 한인회 연합체를 표방하는 이 단체는 창립 35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명분도 모호하고 활동도 거의 없어 동포들의 관심 밖이다. 원거리지역에서 총연회장을 맡으면 누군지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캐나다 총연회장’ 자격으로 모국을 방문하면 대우가 달라진다. 현지 동포들은 그런 단체가 있는 줄도 모르는데 한국에 가면 고위층이 나와 캐나다의 총 대표라고 깎듯이 모신다. 동포인구가 가장 많은 토론토의 한인회장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 이름 뿐인 단체가 이달 말 17대 회장을 뽑는 선거를 치른다. 저 멀리 에드먼튼에서. 그 먼거리를 자비들여 누가 참석하겠는가. 그것은 현지 한인회장이 이미 총연회장에 내정됐다는 얘기다. 참다 못한 이진수 토론토한인회장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나름 한인사회의 신망을 받고 있는 이 회장은 “이름뿐인 단체이긴 하지만 가만히 있자니 무슨 엉뚱한 일이 있을 것 같아 고심 끝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와 비슷한 단체가 ‘캐나다한국학교총연합회’란 곳이다. 정작 일선 한글학교들의 구심체이자 가장 대표성을 띤 단체는 온타리오한국학교협회인데 단체명에 ‘총’ 자가 들어가니 마치 캐나다 전역을 대표하는 상위기구처럼 비친다. 이러니 모국에서도 한글학교 교사 초청사업을 총연합회와 상대하는 것이다. 오타와대사관도 언젠가부터 ‘총연합회’만 상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해외동포들이 모국에 가서 대우 좀 받으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난 2011년 토론토 G20정상회의에 참석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토론토 교민간담회에서 주목할 발언을 했다. 동포사회를 위해 모국에서 지원 좀 해달라는 잇따른 건의에 “주류사회서 성공하려면 먼저 본인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70% 이상의 노력 뒤에 20~30% 정도의 도움을 (조국에) 요청해야 한다.” 그의 발언은 동포사회가 너무 모국만 바라보지 말고 동포들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나는 당시 이 발언을 듣고 해외동포들이 모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나 기대감은 갖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국은 생각처럼 만만한 곳이 아니다. 현지에서 확실한 기반을 잡고 살아야 모국에 가서도 당당할 수 있다. 모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에 충실할 일이다.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