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이민 초기,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 많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 주변의 친지들은 이민사회에서는 동족을 속이는 한국사람이 많으니 이민 가서도 한국사람들과는 상종을 말라는 충고들을 많이 했다.
이런 소리를 자주 듣다 보니 오죽하면 토론토에는 한국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한국사람이 적은 도시만 생각하고 그쪽으로 답사를 갔다. 토론토는 아예 마음에도 없었다.
그러나 운명은 어쩔 수가 없는지, 먼저 도착한 동서네를 따라 토론토 서쪽 근교에 정착했다. 시 외곽에 정착한 것 역시 노스욕에는 한국사람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 당시 비슷하게 출발한 이민동기는 지금 집값이 엄청 올랐는데 나는 판단 착오로 이 모양이 됐다!)
외곽도시에 살다보니 한국인을 상대할 일이 없었고 출발은 그런대로 순탄하고 마음도 편했다. 집도, 차도, 보험도, 모두 외국인에게 샀다. 그런데… 그들의 느려터진 일처리가 한국식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나를 속 터지게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에서 하던 일(기자)을 이민 와서도 다시 하게 되면서부터 나의 생활은 온전히 한국식으로 돌아가게 됐다. 일상의 대부분이 한국인과 상대하는 일로 채워졌고 한국인의 장점이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에 경험한 기분 좋은 일 한가지. 최근 자동차 리스기간 만기를 2개월 앞두고 4년 전 거래했던 한인딜러 C씨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그때 그가 아주 친절하고 신속하게 일처리를 해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다음 날 내 사무실에 들렀고, 차를 이것저것 살펴 보더니 반납하려면 대략 4,500달러 정도가 들겠다고 했다. 우선 마일리지가 크게 넘었고 앞창 유리에 돌자국이 나있으며 타이어도 너무 마모돼 교체해야 하고, 차체에 긁힌 자국이 이곳저곳 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전에도 차를 리스하면 반납할 때 애를 먹는다고 들어서 가슴이 철렁했다. 한꺼번에 그 많은 돈을 내야 한다니.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이 뜻밖이었다. 그런 비용이 들겠지만 회사에서 다 부담하고 대신 새 차를 다시 렌트할 경우 매월 내는 금액에서 5불 정도만 추가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첫달치는 안받고… 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하지.
그 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데 리스가 만료되기도 전에 새 차를 사무실 앞에 대령해놓았다. 세상에, 이렇게 편리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다니! 진심으로 그 분이 고마웠다. 차보험 갱신도 내가 거래하는 에이전트 M씨와 서로 연락해 나는 그냥 사인만 하면 됐다. 그 보험 에이전트 역시 아주 친절하고 유능한 사람이다.
새 차의 열쇠를 건네 받으면서 한국인의 신속 정확한 일처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모든 일이 이처럼 시원시원하게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4년마다 새 차를 탈 수 있으니 앞으로도 차는 리스를 하되 그 분만 상대할 예정이다.
물론, 그가 나에게만 그리 친절하게 했을 리 없다. 또한 차를 팔려면 친절은 기본일 것이다. 그래도 한번에 그렇게 시원하게 일처리를 하는 것은 쉽게 보기 어렵다.
어느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어떤 분은 뭘 그런 걸 갖고 그리 감동하느냐고 했다. 그러나 캐나다의 일반적인 풍토, 특히 공무원들의 안일하고 느려터진 행정처리에 분통 터지는 경험을 한 많은 사람들은 그런 기분을 이해할 것이다.
한국이 지금처럼 급성장한 것은 일부 부작용도 없진 않지만 이 ‘빨리빨리’ 정신이 한몫 한 것이 사실이다. 은행을 가보시라. 이곳은 아직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 대기표를 받아 느긋하게 책을 보며 기다리는 방식이 한국에서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시행됐다.
은행의 어이 없는 실수도 잦다. 분명히 공과금을 냈는데도 안낸 것으로 돼있고 이를 고쳐 달라면 한없이 시간을 끈다. 지난주는 신한은행 쏜힐지점 개점식에 가보고 그 말끔한 분위기가 고객들을 참 편하게 맞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처럼 한국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도 40살이 훨씬 넘어 이미 온 나로서는 쉽사리 바뀔 수 없는 그런 사고방식 탓이 크리라.
개중에는 한국사람 이미지를 흐려놓는 경우도 없지 않다. 집이나 건물의 레노베이션을 맡겼더니 부실하고 엉망으로 해놓는 경우도 없지 않고 일부 업자는 중간 공사비만 빼먹고 마무리도 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유학생이나 조선족 종업원을 쓰면서 인건비를 떼먹는 업주도 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한국사람은 안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자동차 딜러 같은 분만 만난다면 한국인을 욕할 일이 없을 것이다.
동족에게 피해를 당하면 더욱 실망하는 것은 그만큼 기대치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엔 벼라별 일이 다 있는 법. 그러니 이왕이면 한국사람이 하는 업소를 이용하고 집도, 차도, 변호사도, 회계사도 한국인 전문가를 믿어볼 일이다.
누군가는 한국사람 못 믿겠어서 외국인에게 맡긴다고 한다. 물론, 한인종사자들의 의식과 양심이 중요하지만 일단 동족끼리 믿는 풍토가 중요하다. 다소간의 허물이 없을 수 없으나 그것은 인간세상 어디나 그럴 수 있다. 한인업소들도 동족에게는 더욱 잘 해줄 일이다.
우리는 자랑스런 한국사람,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잖아도 새 이민자가 끊긴 상황에서 우리들은 자칫 고사할 처지다.
“역시, 한국사람이 일을 잘해” 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노력하자. (해간 66기)